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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선교 소식


 코트디부아르 정쟁의 역사

2011-05-04 00:32:05, Hit : 4564

 

코트디부아르 정쟁의 역사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래와 같이 알려 드립니다.
1.Felix Houphouet Boigny (패릭스 우푸에 브와니) 초대대통령 카톨릭신자
2.Henri Konan Bedie(앙리 꼬낭 베디에) 2대 대통령 카톨릭신자
1999년 12월23일 쿠테타가 일어남.
3.Laurent Gbagbo (로랑 박보) 3대 대통령(민족주의자, 역사학자), 개신교신자
4.Alassane Dramane Ouattara (알라산 드라만 와따라) 반군지도자 모슬렘

아이보리코스트로도 알려져 있는 코트디부아르는 세계 카카오 생산 1위, 커피 생산 3위이며, 석유, 천연가스 등 여러 지하자원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나라로서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다. 1893년부터 1960년 독립하기 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며, 1960년 독립과 더불어 Felix Houphouet Boigny 가 초대 대통령으로 33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1960-1933)
이 동안 프랑스는 이 나라의 유일한 파트너로서 모든 조약이나 계약은 프랑스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었고, 그 대신으로 이 나라는 프랑스의 지원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푸에 초대 대통령은 서부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문호를 개방함으로 주변 나라에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한 때, 외국인 비율이 48%까지 치솟게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전적인 지원 속에 우푸에는 단일 정당인 PDCI-RDA를 통해 홀로 장기 집권을 했으나, 젊은 대학교수였던 로랑 박보 등 여러 야당 인사들의 투쟁의 결과로 코트디부아르는 1990년에 다당제를 도입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면서 주요 수출품인 카카오와 커피 값이 폭락하면서, 이 나라는 경제적 위축기에 들어가게 되면서, 1990년 이미 연로한 우푸에는 IMF의 권유로 알라산 드라만 와따라라는 젊은 경제학자를 국무총리로 영입하게 되는데, 와따라는 그 당시 서부아프리카 중앙은행의 부르키나파소 대표로서 부총재를 역임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거의 외국에서 신병치료와 요양 중이었던 우푸에를 대신해서 와따라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993년 초대 대통령이 서거하자, 후계자 갈등이 표출되었는데, 국무총리 와따라가 헌법에서 정한 계승자인 국회의장 앙리 코난 베디에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고 시간을 끌며 다른 의도를 보이자, 그 당시 당의 사무총장이었던 폴로고와 합참의장이었던 로베트 게이 장군의 지지로 앙리 꼬난 베디에가 정권을 계승하게 된다.
이로 와따라는 국적 위조 죄로 베디에 정권에 의해서 쫓겨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고, 2년 후, 1995년 대선에서는 선거 시스템의 불투명성을 이유로 로랑 박보는 선거 불출마를 발표함으로 베디에가 대통령으로 재선을 하게 된다.

외국에서 생활하며 IMF에서 중책을 맡아 일하면서, 와따라는 1999년 로버트 게이 장군을 통해 쿠데타를 일으켜 베디에를 몰아내었으나, 원래 선거만 조직하고 물러나기로 했던 군사정부가 입장을 바꿔, 게이 장군 자신이 대선에 출마하면서, 알라산은 국적 불투명으로, 베디에는 대법원의 부정축재자 판결로 입후보 자격을 박탈함으로, 사실상 로버트 게이 장군과 오랜 야당 출신의 로랑 박보 두 사람이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의외로, 국민은 로랑 박보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고, 선거 결과가 예상과 달라지자, 게이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당선을 선언하였으나,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에 부딪혀, 결국 게이는 자신의 고향으로 망명하고, 박보가 대통령직에 취임하게 된다.

2000년 10월 취임 후, 박보는 일연의 제도 개혁을 시도하면서, 그동안 프랑스만 독점하고 있던 시장을, 미국, 중국, 인도 등 모든 나라에게 개방하여, 자유 경쟁 체제를 도입하게 되고, 프랑스와 연계된 프랑 세파 권을 벗어나, 자체 화폐를 도입할 계획도 세우게 된다.
식민지 시절부터 오늘까지 기득권과 특혜를 누려온 프랑스의 눈에는 이 정권을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부르키나파소가 반군 훈련 장소를 제공하고, 프랑스의 재정 지원으로, 쿠데타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60년 독립 시부터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 사이에 체결된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박보 대통령은 프랑스에 이 쿠데타 준비 사실을 통보하고 개입을 요청하지만, 프랑스 정권은 이 정보는 사실무근이며, 혹 그런 일이 있게 될 경우, 즉각 개입하여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나, 결국 여러 핑계를 대면서 군사개입을 거절하고, 오히려 반군을 보호 지원하면서, 주변 나라들에게 정전 협정을 위한 중재를 요청하였고, 이에 이웃 나라인 토고 대통령(에야데마 야싱베)이 개입하게 된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토고 로메 협상, 프랑스 마르쿠시스 협상, 가나 아크라 1, 2, 3 협상, 로메 2 협상, 남아공 프레토리아 1, 2 협상, 와가두구 정치 협상 등 모두 9차례의 협상을 했지만, 반군은 막무가내로 무장해제를 거부하면서 시간을 벌며, 북쪽의 은행을 털고, 금광, 다이야몬드광, 목재, 커피 카카오 등을 약탈하여 이웃 나라들로 가져가 수출을 하는 등 하여, 오늘 날 카카오가 전연 생산되지 않는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이 카카오 수출 국가가 되었고, 이웃 가나도 사상 최대의 카카오 수출 특수를 보고 있는 있다. (물론 이 약탈에도 프랑스군의 허용과 참여가 있었다.)

최종의 협상이었던 와가두구 정치 협상을 통해, 야당과 반군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대선 준비에 집중하기로 하였지만, 박보 측의 일방적인 양보와 관용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끝까지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가운데, 프랑스를 비롯한 유엔과 국제사회는 박보가 선거를 회피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고 비난하며, 결국 반군의 무장해제 없이 선거를 치루게 된다. 그리하여, 2010년 10월 31일 1차 투표, 11월 28일 결선 투표가 치루어졌는데, 반군이 지배하고 있는 북쪽지역에는 자연히 엄청난 부정투표가 자행이 되었고, 이로 인해 선관위는 법으로 정해진 3일 기간 내에 결과 발표를 하지 못했고, 국제사회에서 온 선거참관인들의 부정선거 고발에도 불구하고, 4일째 되는 날, 선관위 위원장이 홀로 양 후보 중 한명인 와따라 선거 본부에 가서 국제언론 앞에서 와따라의 승리를 발표하게 된다.

이 나라 선거법에 의하면, 선관위에서 임시 결과를 발표하면, 헌법 위원회에서 후보자들의 부정선거 고발에 대한 심의를 거쳐, 최종 결과를 발표하도록 되어 있는데, 박보 측의 부정선거 고발에 대한 헌법위원회의 심의 기간 중에, 너무 성급하게도 유엔 대표(최영진)가 자체 발표를 통해, 와따라의 승리를 보증(Certification)하게 된다. 이 발표가 있자, 거의 모든 국제사회가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에 와따라 당선을 지지한다고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와따라는 선관위와 국제사회가 자신의 당선을 인정하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박보는 법에 따라 헌법위원회에서 부정선거구의 투표를 무효화하고 자신의 승리를 최종 확증했다고 주장함으로, 양측 간에 양보할 수 없는 선거결과 불복의 출구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자 프랑스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는 서부 아프리카 연합에서는 박보를 무력으로 축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아프리카 연합에서는 박보의 요구를 따라, 재검표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 듯했으나, 결국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 유엔의 반기문 총장이 아프리카 연합 정상회의가 열리는 아디스아베바까지 날아가, 물밑 압력외교를 통해 결국 와따라의 손을 들어주도록 결정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이때, 반기문 총장의 “재검표는 극히 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유명한 발언이 한 때 인구에 회자되었다. 같은 기간 비슷한 상황을 거친 아이티에는 유엔에서 재검표를 제안하여 참된 승리자가 밝혀지도록 하고는, 코트디부아르에서의 재검표는 극히 부당한 처사라는 이율배반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와따라측은 14년간 전쟁을 치른 라이베리아, 11년간 전쟁한 시에라리온, 부르키나파소, 말리, 세네갈, 나이지리아 등 이웃나라로부터 엄청난 수의 용병들을 불러 들이고, 이들을 각 지역과 수도 아비장의 각 지역으로 유엔군의 헬기와 전차를 통해 배치하는 등 전쟁준비를 강화해 왔고, 결국 3월 28일, 반군과 정부군 쌍방이 대치해 있던 중부전선으로부터, 프랑스군과 유엔군의 헬기를 동원한 폭격을 통해 순식간에 아비장까지 반군들이 밀고 내려오게 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정부군들은 사방으로 이탈하게 되고, 며칠에 걸친 프랑스군과 유엔군에 의한 정부군 각 부대의 무기고와 중화기에 대한 폭격에 이어, 대통령 궁과 대통령 관저,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 대한 폭격으로, 결국 4월 11일, 박보 대통령은 반군에 의해 체포되게 된 것이다.


  KPAD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여 훌륭한 전도와 선교의 도구로 쓰임빋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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