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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 구주요 주인이신 예수님

2015-10-29 11:06:51, Hit : 1916

 

가정의 구주요 주인이신 예수님

하나님은 "가정"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근거가 있습니다. 노아는 온 집안 식구를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건조했습니다(창7:1,히11:7).빌립보의 간수는 그의 집안 식구와 더불어 구원을 받았습니다(행 16:31). 하나님은 유월절을 위한 지시에서 "식구를 위해 어린 양을 취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출 12:3).
부모들은 이와 같은 성경의 표본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하나님을 위해 저들의 집안식구들을 잘 보살피고 간수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개심을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의 덕택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주님, 나는 크리스찬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섬기고 싶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하고 그는 말했습니다.모니카는 쉬지 않고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어거스틴의 단단한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까지도 교회를 위한 축복의 수원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의 신실한 기도를 통하여 얼마나 수많은 아이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되었는지 오직 하늘만이 밝혀질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가정생활을 위한 최초의 요지입니다. 식구들은 각자, 자기 자신의 환경과 신분에 따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와 사랑과 용납을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는 예수님이 가정의 "구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어린 아이라도 이러한 경험을 겪을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8:6). 마가복음의 이와 유사한 말씀은 그 아이가 예수님의 팔에 안길만큼 아직도 어리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막 9:36). 사도 바울은 에베소와 골로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할 때(엡1:1,골1:2) 분명히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편지의 후반에서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저들의 부모를 순종하라고 직접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6:1-3,골3:20). 어떠한 일이든지 주 안에서 하는 일을 신자들에게 가능합니다.

성경은 어린 아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성주의에 대히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성서적 신앙개념에 대한 과도한 지성의 산물입니다. 신앙의 자각적이며 지성적인 면은 완숙한 이해와 지식에서 생긴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신앙요소 즉 영적인 생활 융화로 끝나는 개인적인 믿음은 과정에 대한 사람의 정신적 이해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호의에 의존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지성적인 이해력의 수준에서 이에 응답할 수 있는 성인 뿐 아니라, 감정과 직관적인 반응의 수준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보여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바라고 믿게) 하셨나이다 (시22:9,확대성경).

젖먹이 아이는 하나님에게 지성적인 이해력의 수준에서 응답하지 않스빈다. 아이의 소망과 믿음은 좀더 본질적인 수준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진실"입니다. 그것은 아이가 지성적인 이해력을 획득하는 날을 기다리는 어떤 종류의 "예비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해력은 우리의 심령에 가까이 오시려는 하나님의 접근을 제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성적인 말로 그 과정을 이해하고 묘사할 수 있기 훨씬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모태에서도 주 예수님에게 명확한 응답을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 엘리사벳의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눅1;41-44).

실로 성경은 문제를 바로 정반대의 관점에서 봅니다. 참으로 신앙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이의 미숙한 지성이 아니라 성인의 순수하지 못한 지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8:15-17). 우리가 천국을 받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어린이들이(갓난 아아까지도)진실로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장해 줄 예수님의 명백한 권한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정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근본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아주 작은 어린 아이에게도 역사하시어 그를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들어가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한 근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로서 우리의 문제와 책이을 종종 곡해 해왔습니다.한쪽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요"라고 찬송가를 가르칩니다.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우리는 아이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아이가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고 아이들이 자기가 노래하고 있는 것을 정말로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이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습니다. 아이의 문제는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 경험의 부족입니다. 부모가 할 일은 그러한 믿음으로 하여금 경험에서의 지름길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부모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방법으로 아이가 일상의 생활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있을 때 경험을 요구하는 일이나 경험을 요구하는 일이 없더라도 지성적인 신학자들조차 믿음과 경험을 늘 비교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경험의 원인"이 됩니다. 신약의 믿음은 "표적을 찾는 "믿음이 아니라 틀림없이 표적이 따르는 믿음입니다(막16:17). 바꾸어 말해서, 사람들은 믿기위해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은 틀림없이 확실한 경험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경험이 없는 신앙은 냉담하고 생명력이 없고 형식적이며 법을 존중하는 신앙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가르침을 따르도록 지도해야 하며 또한 "그가 지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히11:6) 경험하도록 저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아이들과 기도하는 방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하나님, 우리 엄마와 아빠를 축복해 주옵소서."하고 시작되는 실제적인 '신앙'의 기도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이 침실의 기도는 좌절이나 실망에 다소 둔감한 기도이지만 명확한 응답을 구하고 기대하는 기도입니다.

언젠가 우리집 막내 아들이 학교에서 상패로 받은 핀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이는 넥타이에 그것을 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큰 불명예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는 온 식구가 그 핀을 찾기 위해 아이의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기도시간에 아이는 우등 핀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틀 뒤,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도착하니까 막내 아이가 문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아빠, 핀을 찾았어오.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신거예요!하고 좋아라 했습니다. 진지하고 신학적으로 정확한 어떠한 이론이나 지식도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간단한 응답만큼 저 여섯살 먹은 소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납득이 가도록 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학문적인 교리만으로 되어 있는 아이는 그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다른 라이벌 교우와 부딪칠 때, 아이의 신앙이 심하게 흔들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이 실재를 수없이 만나 본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는 자기 믿음의 유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본 궤도에 올려 놓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을 신앙의 간단한 모험 가운데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빈다. 우리의 위선적인 허식뒤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이 잠재해 있습니다. 글쎄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만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지금 당장 그것을 찾아내어 이러한 위선적인 넌센스를 없애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을 고할 수있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 자녀에게 손가락도 까닥하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위선과 경망한 언동을 덜 수 있도록 지금 당장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학생들이 어떤 요소에 있어서 신앙을 잃어 버릴까봐 주어진 그러한 요소를 포함하는 실험을 실행하지 않는 교수는 과학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희생할 것입니다. 한편 자유스럽고 공개적으로 실험한 교수는 그의 학생들에게 그러한 요소가 여러가지 조건 하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정확하고 자신있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가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신다고 경건한 주장을 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때때로 "아니다"또는 "기다리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셨을 때 그것이 반드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답을 함부로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기도의 결과에 대하여 겸손하게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데리고 우리가 신앙을 테스트할 강을 건널만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이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실 때까지 일심불란하게 기도하는 곳이 이곳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느니 일이 실현되는 곳이 이곳입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공하지 못한 실험과 같습니다. 그것은 더 깊은 연구를 하라는 격려요 자극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안전하게 앉아 있는 높은 아성이 아니며, 인생의 사소한 갈등과 시련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아닙니다. 믿음은 인생의 모든 싸움에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우리는 불행과 재난을 당하고 있으며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불안과 의심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싸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감히 우리의 믿음을 사용했기 때문에 계속 이기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활과 가깝습니다. 믿음은 부엌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운동장에서 완전히 작용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 생활 속으로 모셔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합니다.

아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신앙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저들의 부모가 대담한 모험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그저 알기만이라도 한다면 저들은 믿음이 조화되고 완성되는 과정에서의 실망과 좌절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저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리고 이러한 시험 가운데서 저들의 믿음이 성장할 것입니다. 이는 저들이 예수님을 살아계시는 분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성과 논쟁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대면으로 세워집니다. 믿음은 다른 사람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될 수 있찌만 그것은 개인적인 대면(만남)으로 발전함으로써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여자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남으로써 저들의 믿음이 더욱 왕성해졌던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4:39-42).

예수님을 여러분 가정의 "구주"로 모시십시오. 예수님에게 주님을 여러분 가정의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서약하십시오. 예수님은 집의 객실에 거하시지 않고 안방에 거하십시다. 가정에 토의와 활동과 결정사항이 있을 때 항상 예수님을 가정의 주재자로 모시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가정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물러나는 것은 이러한 점에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가정의 주재자로 모시는 일을 소홀히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주권에 불순종할 때 우리는 가정에서 신앙의 침체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배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서 가정의 화평과 번영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가정은 가정의 모든 일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모든 생활과 활동의 영역에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활의 기본적인 두 요소를 주님에게 바치는 일인데 그 두 요소는 시간과 돈입니다.

시간은 매일 가정예배를 위해 바치는 일정한 시간입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 시간을 뜻하는 경험이 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 특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특별히 시간을 바치는 필요성을 주목해 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실로 살아 계신다면, 만일 주님이 진실로 우리 가정의 주인이시라면, 매일 주님에게 바치는 시간에 인색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정예배를 위해 특별히 바치는 시간이 가정의 여러가지 일에 변화를 일으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 이유는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시간을 온전히 위임할 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몸을 맡기는 것 사이에 반응의 상황을 세우십시오.아침식사에 시간을 맡길 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먹는 음식을 좇아 행동합니다. 이때 음식은 여러분의 몸에 필연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약속한다면, 여러분의 하루는 그 영향을 받습니다. 그 친구의 하루 일정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 밖에 주차장 직원과 식당의 웨이트레스와 조리사도 모두 여러분의 방문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가정이 오로지 예수님에게 하루 중 중요한 시간을 바칠 때, 그 가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과 번영의 은혜로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귀중한 시간을 바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모든 창조적인 가능성의 문을 하나씩 둘씩 열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바치는 두번째 요소는 돈입니다. 돈은 가정의 전체 수입 중 주님께 바치는 적어도"열의 하나"를 의미합니다. 돈은 어떤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응고된 땀입니다. 돈은 우리가 발행한, 시간과 기능의 보증서입니다. 이 보증서는 우리에게 어떤 물질적인 일용품을 요구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래, 인간은 두려움과 욕심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통하여 물질적인 생활 필수품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아직도 그가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정의 수입의 첫 열의 하나를 주님에게 바칠 때, 그것은 가정의 물질적인 운명을 하나님에게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정력의 쇠잔해진 휴머니스트의 애타적인 주장에 거슬릴지라도 성경은 십일조가 "투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하나님은 가정에 십일조를 요구하실 때, 두려움과 욕심을 버릴 것을 부탁하시고 하나님에게 수입의 첫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보답으로 하나님은 저들에게 물질적으로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러한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정은 주님께서 우리들의 노력과 일을 축복해 주실 수 있으며, 불필요한 지출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부족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는 통상 엄연한 의무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의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통하여 우리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아울러 "안전"의 축복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가정의 안전은 물질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안전이 어떤 직업이나 재산의 축적이나 금전의 저축이 아닌 주님에게 뿌리박히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유형의 재산이나 직업은 하루밤 사이에 소멸되거나 파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수입의 첫 열의 하나를 당신께 바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받을 물질적인 축복과 가정의 안전을 약속받는 보증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가정의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어떠한 일류 주식유가증권목록도 겨룰 수 없는 안전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시간과 돈이라는 기본적인 요소는 가정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위한 기초를 세워줍니다. 이 두 요소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교를 가장 열망할 때, 그리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할 때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켜 줍니다.


출처: 한국컴퓨터 선교회


  KPAD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여 훌륭한 전도와 선교의 도구로 쓰임빋기를 기도 합니다



  가정의 구주요 주인이신 예수님 
 KPAD
1916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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