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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령한 자 - 오영관 목사

2011-05-28 01:14:22, Hit : 2623

 

본문: 고전 2 : 10-3 : 3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께서 움직이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사람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에 의해서 움직입니까?

사람이 일을 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즉 돈을 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위험에 빠뜨리거나, 아니면 그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나 욕구가 있을 그때 움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돈을 받고, 그것이 목적이 된다면 때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후회하며 회의감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움직일 때 마음속에 평화가 있고 사랑과 은혜가 있기에 후회 대신 하늘이 주시는 풍성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에 의해 움직여 질 때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고로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로 인한 하나님의 사람, 신령한 사람으로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돌파구는 영적인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한국교회는 독특한 영성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발전도 많이 했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알아야 현재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 세분의 목사님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길선주’목사님(1869-1935)은 계시록을 강의하며 말세와 재림과 종말론적 설교를 하셨고 ‘김익두’ 목사님(1874-1950)은 1900년 27세 때 “가슴을 칼로 찢는 것과 같은 성령의 내적임재”와 기적의 신유은사를 가지고 1919, 달성 현풍교회 박수진의 아래턱이 떨어져 늘어진 것을 고치고, 1920, 사원리교회 박달옥의 혈루증, 고령, 장의덕의 반신불수, 부산진, 김두수의 앉은뱅이, 진영, 임수경의 혈루증 등,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1921, 임택권 목사님은 3년간의 조사 후에 ‘이적증명서’를 발행했고, 1923, 장로회헌법 제3장 1조에서 “금일에는 이적행하는 기적이 정지 되었느니라”는 조문이 고쳐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님은 신비주의적으로 흘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한국교회는 ‘심령부흥회’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단점은 현실은 파악하나 해결하려는 행동이 매우 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영성개념이 매우 좁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역사성이 있습니다. 고로 한국교회 역사를 알아야 현재의 자신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성서이원론‘(Dualism)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선하고 착한 곳이며, 세상은 악이 넘쳐나는 곳으로 가르쳐 왔기에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이런 교회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최근에도 문제가 있는 교회의 직분 자들을 상담하면서 안타까운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실망하여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지리도 못살던 한국 배고픔에서 해방되고자 나라 전체적으로 1960 년대 초 거대한 Movement 가 일어났습니다. 소위 “잘 살아보세!” 여기에서 교회는 특히 오순절(Pentecost) 교단 계통에서 삼박자 구원의 ‘축복대성회‘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령부흥회’가 ‘축복대성회’로 옷을 갈아입고 사람들에게 다가왔습니다. 백성들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잘 산다“는 축복의 구호에 예수의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라“는 한국교회 전도의 간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축복대성회’를 통하여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교회에 세상의 부패한 가치관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물질이 아닙니다.
대신 교회는 복음에 바탕을 두며 바로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드디어 교회는 영적인 성장이 둔화되고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져 복만 바라는 기복적인 뜨거움만 추구하는 열광적인 교인을 양산하게 되어 교회 정체성의 문제(Crisis of identity)를 낳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즉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또 어떤 것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즉 ‘이신칭의’입니다. 이 원리야 말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불교는 어떠합니까? 인간은 집착 때문에 고통을 받는데 여기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없애야 하고 그 방법으로 인간 자신이 노력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가야 합니다.
인간행위의 구원입니다. 그에 비해 기독교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의 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할 때 ‘샤머니즘’을 깨기 위해 ‘이신칭의’를 강조하다 보니 한국교회는 본의 아니게 기독교가 왜곡되게 전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에 행위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신자는 믿음만큼 행위가 따르지 못하는 절름발이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은혜로 은총의 범주 속에서 믿는 자의 행위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이에 걸 맞는 행위가 따라와야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신앙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령한 자’, ‘신령한 성도’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조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어떤 모습을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믿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선택교리’를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했다는 ‘예정교리’입니다. 물론 교단에 따라 이 교리의 해석을 달리 합니다.


우리 장로교는 ‘예정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미리 예정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령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사람의 생각으로 마음대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사람의 생각으로 해석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과 구웜 받지 못할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결론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전도해야 하느냐는 의문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롬 11 : 2)라고 말씀합니다. 즉 “미리 아신 백성”, ’예정된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롬 10 : 13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서로 반대되는 말씀을 합니다. 언뜻 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상식으로는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 10 절에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신령한 일은 사람의 생각으로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마 7 :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때 구원의 백성, “신령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주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내가 이미 교회를 나오며 예수를 믿으니까 선택되었고 그러니 이제는 적당히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믿는 자로서 나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제 예수 믿고 지난 과거를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동안에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구나, 고로 내가 선택 되었구나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교리입니다.

주께서 맡기신 일, 하라고 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나니까 은혜가 되고 감사의 마음이 한량없이 솟아나올 때, 그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맡기신 일을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야 말로 “신령한 자”, “신령한 성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 : 2)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삶의 종교라고 합니다. 논리(Logic)로는 않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책임을 다한 것을 보니, 내가 진정으로 주의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나오고 기독교인의 삶이 보여 지게 됩니다. ”신령한 자“는 믿음에 삶이 따라야 합니다.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사랑이고, 기독교의 윤리입니다. 고로 ‘신령하다’는 의미는 실천적인 측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갈 5 : 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데 성령과 육체가 서로 대적함으로 신령한 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 삶, 즉 신앙생활은 전쟁터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전쟁입니다. 여러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좌절하고 패배하는 삶이 누구나 따라옵니다. 실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인 누구에게나 있는 정상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늘 승리하는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1이하) 이렇게 갈등하며 애통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국 승리합니다. 비록 밀고 당기는 인생의 치열한 전쟁이지만 승리는 보장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 받고 울음바다가 됩니다. 너무 뜨거워 펄쩍 펄쩍 뜁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남을 비방합니다. 속이고 타락하고 겸손할 줄 모르고, 사람 따라 줄서고, 기분에 따라 편을 가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상처주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자가 과연 “신령한 성도”입니까?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주여!, 주여!”만으로는 안됩니다. “신령한 자”는 “신령한 일”을 합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본문15)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의 가치의 기준은 ‘영적’입니다. ‘영적’이라는 의미는 믿음+행위입니다. 이제는 믿음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의 귀로 사랑을 원하는 자의 소리를 들어 “신령한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윤리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어 부르십니다.많이 쓰임 받게 하십니다. 그러고는 마지막 날에 천국 문 앞에서 윤리로 걸러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성의 최고의 표준은 윤리성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윤리적인 것만 가지고 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냐? 아니지요! “신령한 자”는 성령의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독교 윤리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엡 4 :22 이하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첫 사람 아담을 벗고, 두 번째 아담 예수를 옷 입고,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고, 예수의 모습으로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은 예수를 닮아 가도록 만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점은? 예수의 윤리는 기독론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를 닮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성직자는 물질과 인기와 명예를 가지지 않더라도 거기에 불편함이 없어져야 합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불편함이 있기에 그것을 추구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기에 누구나 명예를 추구하며 이름나기를 좋아하며,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박수와 환호와 기름진 풍성한 것은 기독교 윤리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 예수님께서는 인기와 명예와 자리를 바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파묻히고, 죽는 삶속에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모습을 나타낼 때 그때 성령은 역사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성령의 강한 역사가운데 신령한 일을 분별하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신령한 성도”, “신령한 자”되시기를 축원합니다.


  KPAD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여 훌륭한 전도와 선교의 도구로 쓰임빋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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