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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수고에 평안함이 있는가? - 오영관 목사

2016-06-29 08:04:08, Hit : 1529

 



많은 수고에 평안함이 있는가?


(눅 12 : 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이 있다고 심리학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고독과 소외감으로 아주 쉽게 분노하고, 삐치고, 자신의 환경을 생각하며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만 골라내어 괴로워하는 심적인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증후군은 비단 노인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사이 ‘SNS‘를 즐겨 사용하는, <사이버 스페이스> 즉, 비어있는 공간을 왔다 갔다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 하루를 바쁘게 마치고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커튼을 열고 창문너머로 먼 곳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삶이 공허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집이 ‘장소’(특정)가 되지 못하고 ‘공간’이 되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집이 ‘사는 곳’이 아니라 ‘몸이 머무르는 곳’이 될 때, ‘장소 상실’(Placelessness)이 되어 누구나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상호 소통을 하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인간성이 없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장소 상실’이라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ㅋㅋㅋ,ㅎㅎㅎ‘를 아무리 반복하고 각종 <이모티 콘>을 현란하게 구사해도 그 공간에서의 인간성은 찾기 힘드는 것입니다. 시간 날 때 마다 스마트 폰 붙잡고 각종 사진 올리고, 여러 <페친> 돌아다니며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대고 기발한 ’코멘트‘를 “포스팅’해도 그 공간에서 자신의 삶의 구체성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일찍 이상한 노인네로 변하는 것은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사색과 만남과 책을 읽는, 진실로 사람이 ‘사는 장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나간 한 주간의 세상살이에서 당신은 “많은 수고에 평안함이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 17-20 절에 보면, 한 부자가 등장합니다. 아주 사업적인 머리가 비상한 그 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난데없이 “어리석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것’과 ‘지혜로운 것’의 구별은 무엇이 기준이 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지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지혜로운 자로 살지는 못합니다. 현실을 보시면, 세상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천하 만민을 모아놓고 분별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과 같이 오른편의 양들에게는 칭찬과 상급과 함께 영생으로, 왼편의 염소들에게는 책망과 형벌과 함께 영벌에 처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삶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세상에서의 땀과 아픔과 눈물이 있었던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평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에 사는 동안의 이 기회를 어떻게 살기를 원합니까? 아직도 이 땅의 물질만을 사모할 때, 당연히 평안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부자는 심중에 더 많은 물질을 가지기를 원하고, 넘치는 물질의 보관할 장소만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본문 15 절)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곳간, 내 곡식, 내 가족, 내 쾌락, 내 재산, 하면서 돈 타령만 일삼는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했습니다. 부자가 강조하며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내’라는 말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부자의 마음은 남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에 타인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지장이 있고 평안함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물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오로지 그의 목적은 물질입니다. 물질을 목적으로 생각하고 다 이루었다면 더 이상 그 물질로 할 일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많은 수고에 평안함이 있는가?”를 자신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묻는 작업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지 않는다면, 실제는 하나님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의 한 시점에 물질이 많이 들어오는 좋은 시절이 있을 때, 하나님께 물으며 응답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까? 그 때는 당신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진실한 성도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목적을 세워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이대스‘(Midas)라는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Auto Repair Shop'의 ’Chain'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이대스의 손, Midas touch>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사이는 ‘돈 버는 재주’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우 욕심이 많았던 ‘마이대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부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 후 왕은 자기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모두 황금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먹는 음식까지도 황금으로 변하니 상심이 되어 무심코 자기 딸을 안았다가 황금으로 변하고 맙니다. 지금 해가 지는 황혼에 ’마이대스’ 왕이 부르짖는 그 비통함의 절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은 이 황금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해가지는 그 황혼에 기쁨의 환희 대신 깊은 절망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물질을 그토록 모으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들어 거기에서 평안함을 찾으려 했던 ’마이대스’는 가장 어리석은 자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딸도 그의 손이 닿는 순간 황금으로 변합니다. 이제 그의 소원대로, 그의 꿈대로, 그의 이상대로, 모든 세계가 황금이 되었지만 그는 그 황금의 한 복판에서 물질의 풍성함 속에서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후회의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나의 딸의 생명을 돌려주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한 모금의 물을 주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지나간 시절의 친구들과의 우정입니다.” 지금 ‘마이대스’의 부르짖음을 통해서 어쩌면 이 시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이 시대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으로 나가서 돈 벌어 오라고 작동의 스위치만 넣으면 생각도, 인격도, 꿈도, 목표도, 없이 한 주간을 영혼이 없이 돌아가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며, 우리들 각자 얼마나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여쭈어 보았습니까? 만약 이러한 작업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심령 속에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방귀를 뀌고 내린 <엘리베이터>를 막 탔는데, 나를 뒤따라 타는 사람이 코를 막으며 의심하는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려버리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아주 환장할 노릇입니다. 마음은 막 쫓아가서 내가 방귀 뀌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런 말 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고 우습고 너무 억울하고 한 순간에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방금 째려보며 내린 그 사람의 ‘시선‘이 곧 그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시선을 통해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래서 “시선을 느낀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서로 ‘마주보기’(Eye contact)와 ‘함께 보기’(Joint attention)는 인간만의 위대한 능력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것을 가지고 서로 간에 ‘정서 공유’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짐승은 시선이 마주치면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바로 ‘으르릉’ 거리게 됩니다.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눈 인사대신 “뭘 봐?”하는 한국의 일부 이상한 사람들, 이상해서 마음에 평안은 찾아보기 힘든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 예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여 올 때, “뭘 봐?”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 믿기 힘든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나기에, 그리고 부족한 것을 자신들이 깨닫기에,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포유류‘(새끼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동물)는 어미의 배 속에서 ‘완숙’되어 태어납니다. 일단 태어나면 얼마 있지 않아 자기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섭니다. 반면, 인간만 미숙아로 태어나서 자기 몸 하나 가누려 해도 수개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이 기간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기간에 아기는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눈을 마주쳐야 합니다. 누워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그것밖에 없다. 엄마와 ‘정서 공유’를 하며 그 아기는 평안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말합니다. 미숙함이 있기에 눈을 마주치며 소통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만이 하나님을 만나며 소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광야와 같은 척박하고 험한 세상에 살며, 비록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많은 수고에 평안함이 있는가?” 그분들의 모습은 변함없이 소망가운데 영생을 바라보며 평안을 누리는 성도로 살아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육체의 요구를 위해서는 돈을 벌지만 이것을 어디에 써야 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에는 많은 물질을 투자합니다. 성형수술에 때로는 생명을 걸고 있지만, 영혼에는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어떤 분이 24 개의 교회를 개척) 그런데 왜 영혼에는 그토록 인색합니까? 지나간 한 주간, 168 시간, 여러분은 영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졌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 가까이한 시간이야말로 영혼을 위해 천국의 창고에 쌓아둔 보화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내 계획과, 내 뜻과, 내 생각대로 했더라면 얻지 못했을 행복들을,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바꾸어져 갔기에 훨씬 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늘이 주시는 평안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고통과 실망과 환난들을 나의 관점, 나의 생각으로 볼 때에는, 왜? 하필이면 나인가? 라는 엄청난 불만과 억울함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를 믿는 믿음의 자리에 있다면, 그 소망을 기다려 볼만한 가치가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자리,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말씀에 비춰보면,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시고 큰 위로 받으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16 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점을 치는 여종을 불쌍히 여겨 귀신을 내 쫓는데 이로 인하여 주인이 돈을 벌지 못하자 그 주인은 관원에게 끌고 가서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는 자”라고 누명을 씌워 엄청 때리고는 감옥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아픈 상처를 가지고도 하나님을 찬미할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간수 까지도 예수를 믿게 전도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의 종으로서 가는 곳마다 환대하며 칭찬하는 사람은커녕 가는 곳마다 어려움과 고통과 손해와 비아 냥과 외로움과 고독함과 추위와 배고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면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일을 맡긴 사람에게 편안한 길을 주시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늘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께 순종함으로서 그분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KPAD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여 훌륭한 전도와 선교의 도구로 쓰임빋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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