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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한인장로회 교단 형성의 배경

2006-11-15 00:25:58, Hit : 5574

 

미주한인장로회 교단 형성의 배경  (총회에서 퍼옴)

양치관 목사 (제2대 총회장)

1. 한인의 미주 이민 배경

한국 민족이 미주에 이주하게 된 경로를 대강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 7903년부터 1950년 한국의 해방 전까지
2) 1951년부터 7965년 미 이민법의 수정까지
3) 1966년부터 1978년 미 이민법 수정 이후부터 현재까지

1903년부터 1950년 한국의 해방 전까지 한국 민족은 하와이 섬의 사탕수수밭 농부로 미주 땅의 첫 이민의 발을 디뎠다고 하는데, 1905년까지 미 본토서해안에도 상륙하게 되어 이미 그 수가 7,776명이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민 중에는 개신교 교인이 많이 섞여 있었고 한국에 나간 감리교 선교부의 주선이 컸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로는 한국 이민이 시작된 1903년에 벌써 하와이에 감리교회가, 그리고 1904년에 로스앤젤레스에 감리교회가, 19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감리교회가 차례로 세워졌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 후 내륙 깊이한인들이 이동됨을 따라 뉴욕, 시카고, 감리교회는 워싱틴 DC등에 감리교회를 세웠다.
그 후1945년까지는 1905년 17월 15일 국치(國恥)의 한일합병으로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고, 일제의 압박 밑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 민족이 미국에 이주하는 길은 거의 중단 되었다.
1945년 8월 75일,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한국은 해방의 날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여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특별한 경우의 이주 외에는 발전이 없었고, 1950년 통계에 한인은 불과 7,000명밖에 나타나 있지 않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2) 1951년에서 1965년 미 이민법의 수정까지
이 기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로 유학생의 신분으로 단신 미국에 건너온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미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H. G, Underwood) 장로교 선교사와 아펜셀라(G. Appenzeller) 감리교 선교사, 이렇게 두 사람을 한국에 파송하여 인천에 같이 상륙하여 개신교의 선교를 시작한 후, 장로교의 선교사는 개혁교회 신앙의 영향을 받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신앙을 기초로 하여 한국에 복음을 전하였으므로 한국 사람 본래의 정신적 유형에 상통되는 점이 많아 이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 장로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한국에서 대교단으로 성장하였는데, 이것은 유사이래 선교사상 특기할 만한 대 성공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은 많은 장로교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특별히 상당한 수의 장로교 출신 교역자들이 이민 길을 개척하여 미국에 건너오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장로교인들이 미국에 건너왔으나 미국에는 1906년에 Los Angeles, California에 세워진 제퍼슨한인장로교회와 1919년에 Reedley (CA)에 세워진 한인장로교회 두 곳 외에는 전 미국에 별로 장로교인들을 받아들일 교회가 없었다.
저들은 자연히 미국장로교회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첫째, 언어 장벽 때문에 감정이 통하지 않았고 둘째, 극히 형식적인 교회에서는 무엇인가 정신적인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고 셋째, 교회의 냉정한 태도는 오히려 차별의식을 느끼게 하였고 넷째, 한국장로교회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신앙 밑에 성장하고 훈련받은 저들은 자유주의 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다섯째, 이질적 문화 속에서 격 는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허전한마음을 위로 받고 새로운 힘을 채을 길이 없었고 여섯째, 교회의 조직과 제도와 전통을 쉽게 버릴 수 없는 등의 문제점들이었다.
미국장로교회에서 위로와 만족을 얻지 못한 저들은 자연히 교회 밖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형태에서 장로교 목사들과 장로교 교인들은 얼마 동안의 교회 없는 공백 시기를 지날 수 밖에 없었다. 저들은 그 동안 중요도시에 이미 세워진 감리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일어나는 장로교에 대한동경심과 교리적인 차이는 마음에 많은 충돌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경로는 마침내 장로교 출신 목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1960년 후부터 서서히 미국장로교(U.P.C.)의 까다로운 절차와 제한을 떠나서 장로교회를 세우고 장로교 교인들을 돌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3) 1965년부터 미 이민법의 수정 이후부터 현재까지

서구 위주의 미 이민법 제한으로 미국에 이민할수 있는 길이 막혀 있던 동양인들 에게도 1965년 미 이민법 수정안이 미 의회에서 통과됨으로 매년 70,000명까지 이민할 수 있다는 쿼터가 열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한국 민족의 미국 이민길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이 기간은 한국 민족의 미국 이민사(移民史)에 새로운 전기를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이 기간에는 직업 중심의 기술 이민과 그들의 직계가족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 시기로 그 수는 껑충 올라 1970년 통계에는 70,598명, 1974년에는 717,147명, 1978년에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340,000명 정도를 추산할만큼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이 기간에 절대 다수의 장로교 교인들의 이민이 있었는데 이에 발을 맞추어 많은 장로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대도시에서는 대체적으로 교포수 1,000명 내지 1,500명당 한 교회의 비례로 교회도 늘어났다. 그 중 최대한 반수 이상에 가까운 수가 장로교회인 것으로 추산되었다.

2. 한인장로회 노회 형성의 태동

이러한 과정 중에 장로교 계통의 기관들의 움직임은 어떠하였는가?

1) 한인교회에 대한 U.P.C.의 태도
1960년이 지난 후부터 장로교 목사들은 타 교단의 도움을 받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저들이 교회를 세우게 된 후에 '모(틀)교회'로 믿고 있는 U.P.C.(미국장로교회)가 문을 열고 따뜻이 맞이하여 협조해 줄 것을 기대하며 저들과 상의하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U.P.C.는 뜻밖에도 냉담했고 한인장로교회를 세우는 데 조금도 협조하여 주지 않을 뿐 아니라 텅텅 비어 있는 교회 건물을 예배 장소로 빌리는 것까지 거절하였다. 물론 지방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은 곳도 없는 것은 아니 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대체로 거의 동일한 배척을 받았다. U.P.C.는 한인장로교회를 세우는데 반대하는 태도였고, 한국 목사들은 귀찮은 거지나 고아가 동냥이나 하러 온 것으로 여김을 받는 모멸감을 느끼며 큰 상처를 받아 서러움과 섭섭한 감정으로 그 심정이 매우 복잡해졌다. U.P.C.는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 밑에서 많은 목사들이 자라났으며 그들을 통해서 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교회가 이제는 아름답게 맺어진 복음의 열매가 되어 손 앞에 놓인 광주리에 수북이 담겨져 있는데도 이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찌하여 쏟아 버리고 말았을까? 그것을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원인
첫째, 한인교회의 인재양성을 반대 내지 억제하는 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교회는 한국교회의 유용한 인물을 양성하는 데 근본목적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선발에도 선교사와의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제한되었고 그나마 7년 후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인(sign)을 해야 되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도움만 바란다는 그릇된 선입관 때문이었다. 참으로 근세 한국은 일제의 압박 아래 착취를 당할 대로 당한 연후에 다시 8.15해방 후에 온 혼란, 그리고 거기에 겹친 6.25동란 으로 입은 막대한 참화 등으로 인한 빈곤은 참으로 진정한 사랑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하였던 때였던 만큼 도움의 손만 벌리는 한국교회란 잘못된 인식이 있을 수 있었다.
셋째, U.P.C.의 1960년도 이후의 해외선교 철수정책은 본국에서 할 수 있는 선교 사업에 방해가 되었다.
넷째, 피 선교지 출신 교역자들의 강한 우월감 등도 그 원인의 한 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2) 근인
한인장로교회를 저들이 받아 준다고 할 때에 따르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첫째, 한인장로교회는 대부분이 개척교회 상태로 재정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한국 목사들의 최저 생활비를 도와 주어야 하는 재정 부담이 상당히 염려되었다.
둘째, 한인장로교회들의 예배 장소를 위한 건물이 필요할 터인데 건물을 지어줄 재원이 없었다.
셋째, 한인교회를 받아들인 후, 피차 신앙노선의 차이로 일어날 어려운 문제가 염려 되었다.
넷째, 뉴욕 시카고 나성을 중심으로 한 K.P.C.(한인장로교회) 소속 한인 목사들의 한국 목사들에 대한 악선전으로, 단순한 U.P.C. 목사들은 한국목사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가짐으로 한인 목사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선교의 비전을 올바로 갖지 못한 U.P.C.는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내일의 신앙적 전망이 흐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2) 한국장로회총회의 태도
미국에 한인장로교회가 시간을 다투어 세워짐에 대하여 한국 총회의 해외선교 특히 미주에 세워진 한인장로교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 왔는가? 한마디로 무성의하고 무관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 건너온 목사들이나 평신도들까지도 총회의 정식 파송은 받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목사들은 제 발로 걸어 나온 현지 성도들이나 교포들을 위한 복음의 사도요, 주님의 청지기라 할 수 있으니 그들이 해외에서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이들이 나갈 길이 무엇이고 이들을 위하여 어떠한 대처를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쯤은 당연히 생각하고 염려해 주어야 했을 것이다.
미국에 세워진 대부분의 한인장로교회들은 목사들이 공장에서 땀을 흘려 노동을 하면서 아무런 외부의
원조도 받음이 없이 다만 눈물과 기도로 이룩한 산물이다. 한국 총회는 현지 교회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현지 교회를 이해하고 현지 교회의 요구에 따라 후원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15여년간의 긴 세월을 집을 나간 고아같이 무책임하게 방임해 버렸다. 물론 한국교회 총회는 피 선교 교회인 입장에서 선교교회 영역에 속한 한인교회에 손을 댄다는 것은 U.P.C.와의 선교 협약을 무시하는 것이 되니 직접 관련을 맺을 수 없고 간섭할 수 없다고 이유를 말한다. 그러나 현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중요시해서 사전에 이에 대한 대책을 연구해서 현지 교회가 잘 육성되도록 해주어야 할 것인데 현지 교회와는 아무런 연락과 협의도 없고 또한 현지 교회의 의견을 무시해 버리고,U.P.C. 총회 인사들과의 일방적인 회합을 거쳐서 잘 타협이 되었으니 미주한인교회는 무조건 U.P.C.에 들어가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것마저도 모든 일들이 다 뒤늦게된 후였다.

3. 미주한인장로최 노회 조직 단계

위에서 언급한 대로 U.P.C.에서도 배척을 받고 한국장로회총회에서도 무관심하게방치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 미주한인장로교회들과 목사들이 취할 태도와 나아갈 길이무엇이었을까? 그 길은 세 길 중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1) 환영해 주고 원조해 주는 타 교단에 가입한다.
(2) 독립교회로 남는다.
(3) 한인장로교회들이 뭉쳐서 노회를 구성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1)의 경우, 현실적이고 실리에 예민한 목사들은 환영해 주고 원조해 주는 교단으로 가입하였다. 이 결과로 장로교 목사와 그가 세운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장로교인들 (70-80% 이상이 장로교 배경을 가진)을 잃었고, 목사가 타 교단으로 개종하는 바람에 교역자를 따라간 장로교인들의 80%가 이민 후 장로교에서 다른 교단으로 교단을 바꾸었다는 가장 지조 없는 대표적인 장로교 목사와 교인이란 통계가 Western 111 University의 Hei Chu Kim, Won Moon Hurh. Kwang Chung Kim,세 교수의 조사 연구에서 드러났다(Ethnic Roles of the Korean Church in the Chicago Area,)

(2)의 경우는 그냥 독립교단으로서의 길을 택하는 것인데, 이들의 대다수가 노린 것은 교단 간판을 밝히지
않고 모든 교파 교인을 흡수하는 기회를 얻자는 의도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3)의 경우, 이 길도 저 길도 택할 수 없는 장로교 목사들이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장로교의 전통을 살리며 교회의 전통을 살리며 교회를 감독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힘을 합하여 교회 발전을 도모하며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상회인 노회를 조직한다는 것이 남은 선택의 길이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점들을 검토한 결과 자연히 대부분의 장로교회 목사들의 뜻이 움직이게 되고 의견이 합치되어 미국 내에 차례로 노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서부지역-한인 교포수가 가장 많고 목사가 가장 많이 집합되어 있는 나성에서 1973년 9월 16일을 기하여 한인장로회 미주(美洲)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중부지역-시카고를 중심 하여 노회 조직을 위하여 1∼2년 간 외견을 교환하던 중 드디어 1974년 11월 2일에 한인장로회 재미(在美 )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동부지역-이의 자극을 받은 동부지역의 통합(統合)측 장로교회들은 재미 장신 동문회를 주축으로 드디어 1975년 6월 76일에 한인장로회 동(東 )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직이 된 세 노회의 명칭은 각각 차이가 있었으나 통합측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있었으므로 상호간의 연락을 긴밀히 취하며 서로의 일치를 다짐하게 되었고, 어느 날을 기하여 세 노회장 회의를 가지고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점들을 집중 검토해 보자는 의견 교환을 갖게 되었다. 연하여 미주에 세워진 노회들은
한국장로회총회와 긴밀한 관계를 갖기 위하여 정식으로 한국 총회에 '미주노회 인준 청원서'를 제출케 되었다. (1974, 1975). 이에 대하여 한국장로회총회는 제60회 총회(1975년 9월)에서 미주에 설립된 세 노회를 연합노회 (Union Presbytery)로 인준키로 결의를 하였으나 현지 노회는 아무런 공식적인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4. 한인장로회 미주총회 창립

1) 세 노회장 회의

미국에 동 중 서부지역에 세 노회가 조직되고 보니 U.P.C.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여 지금까지 상대도 하여 주지 않았던 한인노회 대표들과 같이 1977년 12월 5일에시카고에서 회합을 가지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어 동노회 측은 처음부터 거부 하였으나, U.P.C.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는 것도 무익하지 않을 것이고 차제에 세 노회장 회의를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해서 1975년 12월 4일 오후 9시 50분에 시카고 근교 스코키, Holiday Inn에서 한인장로회 미주노회장 김계용 목사, 한인장로회 재미노회장 양치관 목사,  한인장로회 미주동노회장 이병규 목사 등 세 노회장이 모여 노회장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세 노회가
앞으로 나갈 길과 취할 태도에 대한 진지한 의논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항들을 결의하였다.
(1) 노회 명칭의 통일
한인장로회 미주(동?중앙?서)노회로 통일하기로 하였다(The Eastern,Central, Western Presbyters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2) 각 노회 영역을 다응과 같이 분찰하기로 하다(동노회-Penn., W., Va,,N.Carolina, Alabama, 이동지역/중앙노회-동노회와 서노회가 아닌 중앙지역/서
노회-Montana, Idaho, Utah, Arizona 이서지역).
(3) 세 노회는 그 진로와 행동을 통일키 위하여 한인장로회 미주대회를 조직하기로 하되 각 노회에서 5명의 총대를 파송하며, 1976년 8월 중에 소집장 양치관목사로 하여금 소집케 한다.
더욱이 세 노회장은 앞으로 세 노회장의 행동과 발언을 절대로 통일시켜 김계용 목사로 대표 발언케 할 것과 치리 상회를 조직하여 힘을 규합하여 우리의 살 길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역사적인 중요한 결의를 새벽 1시가 다 되도록 가지게 되었다
2) 한인장로회 미주총회 조직
세 노회장 회의에서 결의한 바에 의하여 1976년 8월 9일에 21220 S. 60th St. Cicero. Illinois에 소재한 시세로 한인장로교회에서 한인장로회 미주총회 창립총회에 관한 소집이 공고되었고, 예정한 일자에 총대 5명보다 2명이 더 추가된 7명씩 합계 21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 인 첫 회의가 개최 되었다

동노회 총대-김권석 김규환 김정국 김형숙 이병구   최이열 최양선
중앙노회 총대-김인수 김응율 문장선 방신학 양치관 이선영 이진삼
서노회 총대-김경서 김계용 김장호 오은철 이금식 정대범 최광수

당초 소집 공고 시에는 한인장로회 미주대회로 소집하기로 하였으나 그것은 한국총회와 U.P.C.를 의식해서 중간 기관을 생각하고 시작하였던 것이며, 그 후 대회로 조직함이 마땅치 않게 여겨져서 세 노회 장들과 다시 연락을 하는 가운데 다소 의견차이는 있었으나 회의 석상에서 총회로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U.P.C.에 가입하는 문제는 수일 동안 장시간에 걸쳐서 논의가 되었으나 U.P.C.에 노회 단위로 가입케 될 경우에는 총회 결의에 의하여 최후 결정을 짓는 동시에 총회는 자동 해체키로 한다는 단서를 붙여서 한인장로회 미주총회를 조직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미국 땅에우리 한인이 공식적으로 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하여
새로운 교단출발의 역사적 거보(巨步 )를 내디디게 되었다.
당일에 한인장로회 미주총회 규칙(7장 26조)을 시행 법으로 통과하고, 1954년 이전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을 본 총회 헌법으로 임시 채택 사용하기로 하여, 법에 따라 김계용 목사가 창립 총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총회는 총회의 태도를 밝히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우리의 다짐'을 세상에 발표하게 되었고, 이후 1978년 7월21일에 Los Angeles 소재 나성영락교회 예배당에서 모인 제3회 총회에서 본총회의명칭을 '미주한인장로회'로 개칭( 改稱 )하기로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KPAD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여 훌륭한 전도와 선교의 도구로 쓰임빋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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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에서 보는 가치의 충돌과 변화 
 KPAD
2042 2015/11/21
  미주한인장로회 교단 형성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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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4 200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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